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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영화 리뷰: 어쩔수가없다

by shabet1208 2025.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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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 운명 앞에서 짓는 인간의 덧없는 미소

🎥 운명 앞에서 짓는 인간의 덧없는 미소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 심층 분석

🎬 1. 서론: 돌아온 '미장센의 마법사',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질문

칸이 사랑하고, 전 세계가 열광하는 거장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 (NO OTHER CHOICE)》가 마침내 베일을

벗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이 선사하는 이 강렬한 '숙명론(Fatalism)'적 선언은, 개봉 전부터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과연 인간의 의지는 운명의 거대한 수레바퀴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

이 영화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나 멜로 드라마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감독이 오랜 세월 탐구해온 '욕망, 죄의식, 그리고 구원의 부재'라는 핵심 테마를 가장 냉정하고도 아름답게 응축시킨, 일종의 철학적 논고에 가깝습니다. 영화는 관객이 능동적으로 퍼즐을 맞추고, 도덕적 딜레마 속에서 헤매도록 유도합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우리는 주인공들의 잔혹한

선택의 순간들을 따라가지만,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섬뜩하고도 슬픈 진실입니다.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필모그래피의 정점이라 할 만한 시각적 완성도와, 비극을 탐미하는 감독 특유의 우아함이 결합된 작품입니다. 이 리뷰는 영화의 복잡한 내러티브 구조, 제목이 함의하는 주제 의식, 그리고 숨 막히는 미장센의 비밀을 깊이

있게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 2. 구조적 분석: 두 개의 시간, 하나의 거미줄

《어쩔수가없다》의 내러티브는 직선적이지 않습니다. 마치 잘려나간 필름 조각들을 감독의 의도대로 재조립한 듯,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며 직조되는 비선형적(Non-linear) 구조를 취합니다. 이 구조는 관객에게 지적 유희를 제공하는 동시에, 영화가 다루는 '운명의 거미줄'이라는 주제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역할을 합니다.

2.1. 엇갈리는 시간과 정보의 통제

영화는 크게 두 축의 시간을 따라갑니다. 하나는 주인공 '기태'가 현재의 파국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이며, 다른 하나는 그 파국의 씨앗이 심어지는 7년 전의 격렬하고도 파괴적인 사랑의 순간입니다. 감독은 이 두 축을 교묘하게 엮으면서, 관객에게 필요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거나 왜곡합니다.

우리는 기태가 왜 그토록 절박하게 누군가를 쫓는지, 혹은 그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초반에는 알 수 없습니다. 단편적인 대화와 플래시백 장면들은 마치 조각난 거울처럼 진실의 일부만을 비춥니다. 이 정보의 통제는 영화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관객이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하기보다는, 그의 도덕적 위치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듭니다.

2.2. 복수인가, 순환인가: 카르마의 굴레

이러한 비선형적 서술 방식은 영화의 최종 주제인 '순환하는 비극'을 강조합니다. 기태가 현재에 내린 모든 결정은, 사실 7년 전 그가 혹은 그의 연인이 했던 선택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복수를 꿈꾸는 인물, 혹은 과거를 지우려 하는 인물 모두 결국은 그 과거의 그림자 안에서 맴돌 뿐입니다.

감독은 여기서 멜로와 스릴러의 장치를 빌려와 카르마(業)의 개념을 탐구합니다. 특히 영화 중반부, 기태가 7년 전 연인에게 주었던 상징적인 물건이 현재의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가 아닌, '덫'이 되는 장면은, 관객에게 "이 모든 비극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는 냉소적인 깨달음을 안겨줍니다. 내러티브 구조 자체가 '어쩔 수가 없는' 숙명을 대변하는 셈입니다.

 

💔 3. 주제적 탐구: '어쩔수가없다'는 변명인가, 진실인가?

영화의 제목은 단순히 극 중 인물의 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첨예한 철학적 질문입니다. 과연 주인공들은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요?

3.1. 욕망의 자기합리화로서의 숙명

박찬욱 영화 속 인물들은 대개 극단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쩔수가없다》의 기태 역시 파국적인 사랑과 그로

인해 발생한 폭력적인 사건들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그의 탈출 시도는 언제나 또 다른 파국을 낳습니다.

여기서 '어쩔수가없다'는 말은 자기 합리화의 변명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운명이, 혹은 당신에 대한 집착 때문에"라는 변명은,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반영합니다. 감독은 이 말을 통해

인물들의 선택이 사실은 자신들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욕망에 의해 결정된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이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운명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의 본성이었던 것입니다.

3.2. 구원의 부재와 낭만적 비극

이 영화는 구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세계관에서 죄를 지은 자는 속죄를 통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죄의 늪으로 빠져듭니다.

주인공들은 서로를 파멸로 이끄는 관계 속에서도 일말의 낭만적 감정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이 낭만은 연민과 집착, 그리고 폭력이 뒤섞인 독특한 감정의 덩어리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기태가 피를 흘리면서도 연인에게 "그래도 그때는 행복했다"고 속삭이는 장면은,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잔혹한 사랑의 비극'임을 증명합니다. 그들에게 사랑은 구원이 아니라, 파멸로 향하는 가장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어쩔수가없다'는 그들이 자신들의 파멸을 운명적인 사랑으로 낭만화하려는 마지막 시도인 셈입니다.

 

🎨 4. 미학적 완벽함: 차가운 미장센과 시각적 은유

《어쩔수가없다》를 고품질의 예술 작품으로 끌어올린 것은 다름 아닌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Mise-en-scène)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모든 화면과 사물을 통해 주제를 시각적으로 은유합니다.

4.1. 숨 막히는 대칭과 색채의 심리학

감독은 앵글 하나하나에 숨 막힐 듯한 완벽한 대칭(Symmetry)을 구현합니다. 이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통제되고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인물들은 완벽하게 배열된 화면의 중앙에 위치하여, 마치 체스판 위의 말처럼

운명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특히 색채의 사용은 단연 돋보입니다.

  • 딥 블루(Deep Blue)와 에메랄드 그린(Emerald Green): 주로 기태가 현실에서 벗어나려 할 때, 혹은 과거의 냉정한 기억을 회상할 때 사용됩니다. 이는 고독, 이성, 그리고 통제의 실패를 상징합니다.
  • 블러드 레드(Blood Red)와 골드(Gold): 격렬한 욕망이나 폭력적인 순간, 혹은 파괴적인 사랑의 절정기에 화면을 지배합니다. 이는 격정, 파멸, 그리고 금지된 욕망을 상징하며, 영화의 가장 잔혹한 순간을 역설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냅니다.

4.2. 청각적 마법: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

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은 단순한 배경 음악이 아닌, 또 하나의 서사 축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페르소나인 작곡가와의 협업으로 완성된 음악은, 때로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탐미적이고 서정적입니다. 격렬한 폭력 장면에서도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가 흐르며, 폭력의 잔혹함을 '예술적 행위'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또한, 사소한 소리들(예: 낡은 시계의 초침 소리, 찢어지는 종이 소리, 주인공이 씹는 얼음 소리)을 극도로 증폭시켜, 관객이

주인공의 불안과 강박적인 심리 상태를 청각적으로 공유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운드 디자인은 시각적 미장센과 결합하여

영화에 극도의 긴장감과 몰입감을 부여합니다.

 

🎭 5. 연기 분석: 운명의 무게를 짊어진 얼굴들

이 영화의 주연 배우들은 복잡하게 얽힌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해야 하는 극한의 연기력을 요구받습니다. 그들의 연기는 단순히 대사를 뱉는 것을 넘어, 인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억압된 욕망을 표정과 몸짓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5.1. 기태의 '침묵하는 비극'

주연 배우가 연기한 기태는 파국적인 운명 앞에서 가장 괴로워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연기는 격렬한 감정을 폭발시키기보다는, 그 감정들을 억누르려 할 때 발생하는 미세한 떨림과 균열에 초점을 맞춥니다. 관객은 그의 눈빛에서 '어쩔 수가 없다'

절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인간적 의지가 충돌하는 순간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전달되는 그의 비극은, 격렬한 외침보다 훨씬 더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5.2. 연인의 '파괴적 매력'

기태의 연인 역할을 맡은 배우는 이 영화의 파괴적인 매력 그 자체입니다. 그녀의 연기는 순수함과 악의, 그리고 연약함과

강렬한 힘이 공존하는 모순적인 여성상을 완벽하게 구현합니다. 그녀는 마치 운명의 여신처럼, 기태를 파멸로 이끌면서도

그에게 가장 강렬한 행복을 선사하는 존재입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갑작스러운 미소의 대비는 이 영화의 도덕적 모호성을 극대화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 6. 결론: '어쩔수가없다'가 남긴 여운과 박찬욱의 유산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한 단계 더 심화시킨 결과물입니다. 이 영화는 쉽게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객에게 깊은 사유를 요구하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도덕적 잔해 속에서 헤매도록 만듭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숙명론'적 메시지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온전히 우리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 믿지만, 사실은 사회 구조, 과거의 경험,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 끊임없이 제약받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 제약 앞에서 발버둥 치는 인간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고도 잔혹한 방식으로 그려냅니다.

《어쩔수가없다》는 단순한 영화 한 편이 아닌, 잘 깎아낸 흑요석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예술 작품입니다.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압도적인 미학적 완성도와,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심오한 주제 의식 덕분에, 이 영화는 2025년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 파국적인 미학을 온전히 경험하려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다시' 봐야 할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 역시 '어쩔 수가 없는' 일일 테니까요.

본 리뷰는 영화 '어쩔수가없다'에 대한 심층 분석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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