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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리뷰

by shabet1208 2025. 8. 31.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한병태의 이야기

불의에 침묵하는 우리에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심층 리뷰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 한병태가 성인이 되어 읊조리는 이 독백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한때 온몸으로 불의에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침묵했던 한 인간의 깊은 내면을 관통한다. 1987년 이문열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92년 박종원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1960년대 한 초등학교 5학년 교실을 배경으로, 부패한 권력의 민낯과 이에 순응하거나 침묵하는 소시민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개봉 당시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극찬을 받으며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했고,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와 인간 심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텍스트로 남아 있다.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 절대 권력의 탄생과 몰락

주인공 한병태는 서울에서 지방 소도시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는 전학생답게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지만, 곧 교실의 기이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그 중심에는 반장 엄석대가 있었다. 엄석대는 성적 우수, 우월한 싸움 실력,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의 권력은 단순히 폭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복종하는 아이들에게는 빵을 나눠주고, 칭찬해주며, 심지어 숙제 검사까지 대신해주는 등 '선'을 베풀어 자신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했다. 반면,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에게는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심리적 고립이라는 잔인한 방식을 사용해 굴복시켰다.

한병태는 이러한 부조리한 질서에 본능적으로 반발한다. 그는 아버지의 '정의로운 삶'에 대한 가르침을 믿으며, 엄석대의 독재에

당당하게 맞선다. 하지만 그의 저항은 번번이 실패한다. 담임선생님에게 진실을 호소해도 돌아오는 것은 외면뿐이었고, 다른 친구들은 엄석대의 보복이 두려워 그를 외면한다. 한병태는 점차 고립되고, 결국 엄석대의 폭력에 못 이겨 그의 심부름을 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한병태는 자신을 믿어왔던 가치들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며, '나 혼자 깨끗한 것보다 썩은 무리에 끼어 있는 것이 더

편하다'는 비겁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는 마침내 엄석대에게 굴복하고, 그 체제에 편입된다. 이 영화가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개인의 저항이 집단의 침묵 앞에 어떻게 무너지는가'가 바로 이 지점에서 절정을 이룬다.

침묵하는 어른들, 그리고 무너진 정의

엄석대의 권력이 무너지게 된 계기는 한병태의 포기가 아니라, 새롭게 부임한 엄격한 담임선생님 덕분이었다. 새로운 담임은 엄석대의 비리를 파헤치고, 학생들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반장이 실은 엄석대의 폭력에 의한 결과였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로 인해 엄석대는 쫓겨나게 되고, 교실은 일견 정의로운 질서를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이 결말을 마냥 해피엔딩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엄석대의 몰락 이후, 한병태는 새로운 반장이 되어 권력을 쥐지만, 그는 엄석대와 다를 바 없이 권위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는 '영웅의 부재'라는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엄석대가 사라지자, 그가 구축했던 질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또 다른 권위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독재자가 제거되었다고 해서 독재의 시스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영화 속 어른들의 모습은 더욱 비극적이다. 부모님은 '착한 아이'가 되라고만 가르치고, 교사들은 자신의 안위에만 급급해 학생들의 작은 외침을 무시한다. 이들은 모두 엄석대라는 '괴물'의 탄생을 방조한 공범들이다. 특히, 한병태의 호소를 들은 교사가 오히려 그를 엄석대에게 보냄으로써 '어른'이 자신의 권력과 체제 유지를 위해 얼마나 쉽게 '아이'를 희생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큰 충격을 안겨준다.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여전히 명작인 이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단순한 학교폭력 영화가 아니다. 1960년대 군사 독재 시대의 암울한 사회상을 초등학교 교실이라는

작은 공간에 응축시킨 우화다. 영화 속 엄석대는 단순히 힘이 센 반장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 정권 그 자체였다. 그의

권력은 폭력, 회유, 그리고 다수의 침묵과 무관심 위에 세워졌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만약 내가 한병태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엄석대의 부패에 대해 침묵했던 친구들의

잘못은 없는가?", "지금 우리의 사회는 엄석대가 없는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엄석대의 비웃음 섞인 표정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불의와 부조리를 상징한다. 진정한 영웅은 엄석대에 맞서 싸운 한병태도 아니고, 엄석대를 몰아낸

선생님도 아니다. 그저 이 암울한 시대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던져준다.

따라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과거의 시대극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봐야 할 **필수 교양 영화**다. 정의와 양심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진정한 명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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